안녕하세요, 고운가루입니다.
가끔 저는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마음속에 갇힐 때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지?”
“왜 아직도 괜찮아지지 못했을까?”
“왜 이런 생각을 멈추지 못할까?”
처음엔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시작한 생각인데, 어느 순간 그 생각이 나를 더 깊은 방 안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마음을 살피는 일은 필요하지만, 마음만 계속 들여다보다 보면 삶의 시선이 좁아지더라구요.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탈숙고’는 바로 이때 필요한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탈숙고는 영어로 Dereflection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풀면, 지나친 숙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나 자신과 내 증상에만 과도하게 쏠린 시선을 의미 있는 일, 사람, 가치, 책임의 방향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프랭클은 인간을 단순히 고통을 피하려는 존재로 보지 않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의미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로고테라피는 “왜 나는 이렇게 힘들까?”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이 상황 속에서도 삶은 나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꿉니다.
탈숙고는 고통을 외면하라는 말도
슬픔을 억누르라는 말도
아픈 마음을 모른 척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고통만 바라보다가 삶 전체가 멈추지 않도록 시선을 조금 넓혀보자는 초대입니다.
예를 들어 잠이 오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야 하는데, 왜 잠이 안 오지?”
“오늘도 못 자면 어떡하지?”
이렇게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집중하면 오히려 잠은 더 멀어진다는 거죠. 잠을 감시하는 마음이 몸을 더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발표를 앞둔 사람도 그렇습니다.
“떨면 어떡하지?”
“목소리가 흔들리면 어쩌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이 묶이면 불안은 더 커집니다. 이때 탈숙고는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내가 떨지 않을 수 있을까?”에서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로.
“내가 잘 보일까?”에서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로.
이 작은 방향 전환이 바로 탈숙고의 핵심입니다.
애도의 시간에도 탈숙고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슬플까?”
“왜 나는 빨리 괜찮아지지 못할까?”
“이 슬픔은 언제 끝날까?”
하지만 애도는 빨리 끝내야 하는 숙제가 아닙니다.
슬픔은 사랑이 지나간 흔적이고
그리움은 관계가 남긴 깊은 무늬입니다.
탈숙고는 슬픔 속에서도
다시 삶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가?”라는 질문에서
“이 사랑을 나는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 상실을 지나며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까?”
“지금 내 곁의 사람에게 나는 어떤 따뜻함을 건넬 수 있을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탈숙고는 회피와 다릅니다.
회피는 아픔을 보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탈숙고는 아픔을 인정하되, 아픔만이 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를 너무 들여다보다가
나를 잃어버립니다.
상처를 너무 오래 응시하다가
삶의 다른 빛을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프랭클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삶이 당신에게 건네는 의미를 바라보라.”
나를 살리는 길이 언제나 나 자신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작은 책임을 감당하는 일,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성껏 해내는 일,
아픈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일.
이런 것들이 우리를 다시 삶 쪽으로 데려갑니다.
탈숙고는 이런 말로 다가옵니다.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상처가 나에게 부탁하는
작은 사랑의 방향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요.
오늘 내가 붙들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내 슬픔이 데려다준 삶의 질문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 나는 누구에게, 어떤 작은 따뜻함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탈숙고는 고통에 갇힌 시선을 의미의 방향으로
다시 돌려놓는 삶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탈숙고 할까요?